한목문화재(재실이야기).제사축문 이해.추억의 묘사
永 慕 齋(영모재)
영모재는 밀양에 사는 하 씨 종중의 각종 행사나 선조의 제향을 봉 향하는 재실이다. 밀양 대항에 위치한 이곳이 호군 공 비(備)의 5 세손 영모 공(永慕公) 재정(再淨)이 18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청송으로 피난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귀향하여 선조의 유적을 추 감하여 지은 것이다. 재실 편액을 영모재라 이름했는데 후손들이 공의 호로 삼았다.
영모 재기(永慕齋記)
본 재실은 처음으로 창건한 것이 곧 명나라 만력 연간이었는데. 선조 영모재 공의 묘소가 있어서 그대로 이름 붙인 것이다.
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몸을 빼어 청송 땅으로 화를 면했는데 난리를 피해 다닐 때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뜻을 개연한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 그중에 명나라 장수가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조선의 해가 다시 빛나 종묘사직이 편안하니 요행히 도 난리를 겪고 살아 태평한 날이 돌아왔네"라고 하였으나 참으로 글자마다 충과 분 이 서려있다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바다로부터의 전쟁 기운이 막 걷히고 조정의 천명이 새롭게 일어나서 충렬의 가문을찿아 훈구의 후예들을 등용하면서. 청요직의 벼슬 하나를 선대의 음덕으로 이어받았으니. 성은이 지극 함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부모님이 마음이 서글퍼 일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여
동서 언덕 선산 옛터에다 몇 칸 재실 을지어서 영모재라 편액을 걸었으니 대게 그 어지신 중조 돈재 공과 낙포 공의 유지를
추모함이다. 지금까지 300년 사이에 먼 후손들이 변함없이 예전 그대로 이어받아 수리한 것이 몇 번이었다. 옛날에 큰 글자
석자로 쓴 현판이 있었으나 어찌 잔악한 후손들이 깊이 개탄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올해 겨울에 동종의 의론을 모아 현판의 호칭을 새로 만들어 걸고 옛 사당에 회칠을 새로 하여 우리 선조 돈재 공과 영모재 두 분의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하였다. 아 아 아름답다! 수백 년 숨겨진 광채와 덕성을 오늘 제사 모시는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오래도록 선비들이 우러러보고 후손들이 추모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재력이 없고 힘이 모자라서 묘궁의 제도를 크게 하여 참봉 낙포 공과 같이 실제 행적이 있는 분을 두 분의 사당에 함께 모시지 못한 것이다. 이는 곧 후손들의 안타까움이다.
새겨서 후세를 기다린다.
숭정 후(崇禎後) 기미(己未) 12월
부북면 지명에서 영모재에 대한 이야기
진양 하 씨 재실 중의 하나이다. 영모라는 것은 영원히 부모를 사모하는 뜻이다. 여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때일이다. 향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어린 소년 하재정 이 난리와 중에 황급히 한목 집으로 달려왔으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을 할 수 없었다. 이때 부모님의 거동이 어려운 상태라 처남인 운정의 진주 유 씨 유여주에게 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하재정은 외숙 유여 주의 어린 생질을 데리고 경북 청송으로 피난하여 임진왜란의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피난 끝에 귀향해보니 촌락은 황폐 해지고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길 없었다. 그는 외숙 유여주의 주선으로 마을 뒤쪽 한골에 터를 잡아 초당을 짓고 이곳에 기거하면서 전화 중에 여읜 부모를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을 남겼다. 뒤에 영모재라는 재액 붙게 되고 후손들의 합력으로 재실이 확장 이건 되어 오늘에 이루고 있다. 그밖에 동강대. 추모재. 보본재. 두곡 정. 만희재. 오월 정 등이 있으나 그 명칭 유래는 설명할 수 없다.
追 慕 齋(추모재)
추모재는 하만 창(河晩昌) 공의 묘소가 마을 뒤 서편 기슭에 있으므로 후손들이 재숙 소로 1961년에 창건한 재실이다. 공은 호군 하비(河備) 공의 8대손이며 천성이 호우하여 현달을 구하지 아니하고 은거하여 의리를 행하며 일가친척과 화목하고 이웃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추모 재기(追慕齋記)
증자가 말하기를 "장례를 잘 치르게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백성의 덕성을 후덕한 데로 돌아갈것이다."이라 하였다. 대게 장례는 사람들이 소홀하기 쉬운데 능히 신중하게 하고 먼 조상은 사람들이 잊기 쉬운데 능히 추모하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나 인간의 정으로나 마지못한 일이다. 조상의 신주를 사당에서 조천 하고 나면 그 정신을 바칠 곳이 없어서 묘소에 올라가 한해 한번 제사를 드린다. 제사를 드리자면 제수를 다듬고 재숙 하는 장소가 없을 수 없어서 반드시 묘소에 재실을 만드는데 이를 분암이라한다. 우리나라는 기자 이래로 예의를 지키는 풍속이 일어났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인효로 정치를 행하여 뭇사람들이 조상을 받들고 추모하는 도리를 서로 권장하였다. 이는 이른바 백성의 덕이 후덕한 데로 돌아온다는 말과같이 사람들이 똑같이 고유하게 지닌 품성에 따라 다듬어 정한 것이다. 아 아 아름답도다.
밀양의 대항에 사는진 양하 씨 조상으로 휘 만창이란 분이 있었는데 숙종 무진년에 태어나 효우의 천성을 타고나서 은거하여 의리를 행하고 친척과 화목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 온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그분의 묘소가 마을 뒤쪽 서편 산기슭에 있는데 힘이 모자라 오래도록 재실을 갖추지 못하였다. 이에 신축년 봄에 여러 후손들이 논의하여 재물을 모아 재실 하나를 창건하고 편액을 추모재라 하였으니 대게 조상의 덕성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아아! 세상의 단계가 점차 낮아져서 명분과 교화가 사라져 버리니 드물고 그중에 추모하는 자도 오직 나무꾼과 목동을 금하고 제사를 받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도리를 다하였다고 만족한다. 그러니 조상의 전해오는 덕행과 사업을 닦아 가슴속에 지녀 잊지 아니하면서 능히 형체 없는 데에서도 보고 소리 없는데서도 듣는 효성은 대게 끊어져 알려진것이없다.이제하 씨 집안에서 대대로 그 아름다운 행적을 따라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삼가지 않음이 없어서 조상의 훌륭한 명성을 변함없이 끌고 나가 후손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면 하늘에 계신 조상의 영혼도 감응하시어 온갖 상서를 내릴 것이다. 어찌 아득히 멀어진 조상을 추모하는 이가 없고 백성의 덕행이 후덕한 데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하겠느냐! 대게 먼 곳에서 물줄기를 이끌어오면 그 흐름이 반드시 길고 뿌리 깊이 믈을 댄 곳에는 그 열매가 반드시 무성하니 나는 이이치가 어긋나지 않음을 안다. 이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 큰 운이 장차 열리려고 하는 날 사람들의 본성을 유지하고 사람의 기강을 수립하여 지탱하기를 하 씨 여러 군자들에게 바람이 있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내게 기문을 요청한 이는 공의 7 세손 재두와 재인이다.
을사(1965년) 중추절
東 岡 齋(동강재)
동강재는 증 하수창(河壽昌)공의 묘소가 이곳 동강에 있어 재실의 칭호를 동강이라 하였다. 하수창(1666~1719) 공은 호군 하비(河備) 공의 9대손이다. 효우와 문학이 득실 하였으므로 자손들이 전승하고 계승하기 위해 1961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묘소가 있는 이곳 동강에 재실을 창건하였다.
東 岡 齋 記
河君杓鎭 介其族永箕 致狀於余 曰吾先祖 贈漢城左尹 諱壽昌墳菴有 所謂東岡齋者 成於民國 辛丑二月
하군표진 개기족 영기 치장어여 왈오선조 증 한성좌윤 휘 수창 분암유 소위 동강재 자 성어민국 신축 이월
請子惠而爲之記 余嘗因永箕聞 密州大項河氏 文獻之盛久矣 今按狀 知其本源 實由左尹公始昉 盖左尹公
청자혜이위지기 여상인 영기 문 밀주 대항하씨 문헌 지성구 의 금안장 지기 본원 실유 좌윤 공시방개좌윤공
之行 篤於孝友文學 而子孫襲以爲家法 凡事常務繼述 卽以是齋言之 自公沒 二百四十載之間 豈誠無一
지행 독어효우 문학 이자 손 습이위 가법 범사 무 계 술 즉이 시재 언지 자공몰 이백사십 재지간 기성 무일
曰 可作之會耶 顧以居近瑩下 朝夕瞻拜 僾然 心目不自知 其世代之寢運 而寢遠 崱雖禮制歸于野祭
왈 가작 지회야 고이 거군 영하 조석 첨배 애연 심목 부자지 기세대 지침운 이침원 즉시 예제 귀우 야제
而家家 爲齊宿之所 人人懷奠奉之責 方此時 固無事 於別具屋舍也 然今崱天下長夜 而民生極其離散矣
이가가 위제숙 지소 인인 회전봉지책 방차시 고무사 어벌구옥 사야 연금즉 천하장야 이민생 극 기 이산의
河氏爲是懼焉 遂汲汲具屋舍 擧一門志意 視聽而繫之于一處 蓋東岡公墓山也 齋之而名基墓山 所以象
하씨위 시구언 수급급 구옥사 거일문지의 시청이계 지우일처 개 동강 공묘산야 재지 이명 기묘산 소이상
公也 齋無佗標題 惟中堂顔以念修 所以引詩之語 而相失無忝公德也 夫能象公 而相失無忝 公德
공야 재무 타표제 유중당 안이염소 소이 인시 지어 이상 실무 첨공덕야 부능 상공 이상 실무첨공덕
將爲繼述之善 何以加此 余於狀 得是齋作之之畿 於文辭之外 有以卜河氏 文獻其猶未艾也 慈特表而
장위 계술 지선 하이가차 여어장 득시재작 지지기 어문 사지외 유이 복하씨 문 헌기유미애야 자특표이
記之 以見余文之不苟 而如其間 架規制 及諸人合力 赴功之述 狀自備矣 故不列焉
기지 이견 여문 지 불구 이여기간 가규제 급제인합력 부공지술 장자비의 고불열연
동강 재기(東岡齋記)
하표진 군이 그 일족 영기를 통하여 내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선조 중 한성부좌윤 휘 수창의 분임으로 동강 재라 하는 곳이 있어서 대한민국 신축 이월에 완성되었는데 그대가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내 오래전에 영기를 통하여 밀양의 대 항하 씨의 문헌이 성대하다고 들었다. 이제 서찰을 살펴보고는 그 본디 근원이 실로 좌윤공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좌윤공은 효우와 문학에 득실 하였다. 이를 자손들이 이어받고 가법으로 삼아서 가업으로 계승하는데 항상 힘썼다 이재실로 말하자면 공이 돌아가신 지 240년 사이에 어찌 참으로 지을만한 기회가 하루라도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묘소 아래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쳐다보고 절하면서 마음속으로 예연한 마음이 일어나 세대가 점차 바뀌고 멀어지는 줄도 몰랐으니 비록 예제가 야 제이 기는 하였지만 집집마다 재숙 하는 곳이 되고 사람마다 제사를 받들려는 책임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참으로 특별히 재실을 갖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천하가 어두운 밤이 되고 백성들의 삶은 이산(離散)의 극치에 이르렀다. 하 씨 집안에서는 이를 두려 위하여 마침내 건물을 갖추는 일을 서둘러 온 가문의 뜻과 생각과 이목을 한 곳에 붙들어놓았다. 대게 동강은 공의 묘소가 있는 산인데 재실을 짓고 그 묘소가 있는 산의 이름을 붙인 것은 공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재실은 다른 표방은 없고 오직 중당을 염수라고 하였는데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공의 덕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서로 맹세하기 위함이다. 무릇 능히 공의 모습을 나타내고 서로 공의 덕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맹세하는 것. 장차 잘 계승해 나감에 있어서 이보다 더 한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는서찰을 통하여 글에적힌것외에 이재실을 지은 의도를 알고 이로써 하 씨 집안의 문헌이 아직도 시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특별히 표출하여 기록함으로써 내 글이 구차하게 지은 것이 아님을 나타내거니와 그 칸수와 규모. 체재 및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공사에 달려든 내용은 서찰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나열하지 않았다,
을사(1965년) 7월
報 本 齋(보본재)
보본재는 하태용(河泰龍)공 이하 2세 재도(在圖) 치도(致圖) 창정(昌禎). 우정(宇禎). 서정(瑞淨)의 세 일제(歲一祭) 때의 재숙 소다. 태용은 호군 하비 공의 10 세손이다. 증손 용규(龍奎). 인규. 동규 네 종형제가 공을 위하여 재숙 소를 건립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1931년 신미년에 그현손 승운(升運)이 선지를 이어받아 창건한 재실이다.
보본 재기(報本齋記)
보본재는 우리 4대조 이하의 조선을 한해 한번 제사를 올리는 청사이다. 옛적에 나의 선군자께서는 이제까지 서두르지 못한 모든 종사에 마음을 다하여 정리하셨고 조상을받드는 범절에는 더욱 애를 쓰셨다. 일찍이 종부와 계부 및 종숙부와 의논하기를 승냥이나 수달도 근본에 보답할 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그만 못하여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이에 문서를 만들어 재물을 불렸다. 전심으로 모은 지 수십 년 만에 조금 넉넉해지자. 제전한구역과 분암 몇 칸을 설치하여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도록 도모하였으나. 지난 병진년에 선군자 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체 돌아가시고 종숙부와 종부께서도 또 차례로 돌아가셨다. 아아. 일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사람의 일이 변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일까?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조상에게 보답하는 책임은 불초에게 있는지라. 이에 올해 초봄에 두곡 정 동편에 터를 살피고는 공사를 시작하여 4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에 보본 재가 비로소 우뚝 서게 되었다. 낙성하는 날 아버지를 그리 위하는 아픔을 그 칠 수 없었다. 이재실의 완성이 선군자의 시대에 이루지 못하고 금일에 와사야 창건된 것은 그 또한 때를 기다림이 있아서일까? 돌이켜보면 못난 불초로써 감히 선인의 뜻을 계승하여지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오직 대충 완성한 점은 있다. 아아. 선군자께서 효성으로 추모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근본에 보답할 수 있겠으며 선군자께서 근면 검소하게 기초를 넣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재실을 지을 수 있겠는가? 무릇 조상을 존중하는 데는 제사보다 더할 것이 없고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보다 더할 게 없다. 정성과 공경이 아니라면 비륵 사랑의 모습이 아무리 크고 제기를 모두 갖추었다 하더라도 단지 의식 절차의 말단일 따름이요 어찌 근본에 보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들은 반드시 여재의 정성을 극진히 하여 죽은 이 섬기기를 산이 섬기듯이 하고 사라진 이 섬기기를 남아있는 이 섬 기듯이 하였으며 고향의 나무를 보고는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비와 서리가 내리면 서글프고 안타까움이 생겨나 공경하지 않는 물건이 없고 추모하지 않을 때가 없어서 혹시나 함부로 하거나 태만히 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선군자의 뜻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바라던바였다. 오직 바라건대 우리 조상의 후손 된 자는 선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아침저녁 게을리 말고 변함없이 지녀서 가까이로는 편안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버리고 멀리로는 지켜가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여기서 화목을 돈 득하게 하고 여기서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거의 이재실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신미(1931년) 가을 7월 16일
杜谷亭(두곡정)
두곡정은 두곡(杜谷) 하용규(河龍奎) 공이 말년에 별업을 지으려고 부지를 마련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그 아들 승운이 선지를 받들어 1918년 무오(戊午)에 창건하여 두곡정이라 편액을 달았다. 두곡공은 호군 하비 공의 13대 손이다. 갑오경장 때에 향천으로 향교의 교임을 맡아 강단을 중수하고 후진을 지도하여 향풍을 진작코자 하더니 경술국치를 당하자 두문불출하고 자호를 두곡이라 하였다 모암공 하승운은 두곡공의 아들이다.
두곡 정기(杜谷亭記)
통(通)의 반대를 두(杜)라 하고 야(野)의 반대를 곡(谷) 이라 한다. 세상에 정자를 두는 자는 먼 들판으로 상쾌하게 통하는 곳에 취하는 자가 많은데 나의 벗 하승운은 홀로 두곡에 취하여 정자 이름을 삼았다. 어째서 인가? 두(杜)는 수두 사망(守杜四望 의 두(杜)인가? 이두 간청 두인가?. 난신 복두(難申服杜)의 두인가? 한비 축두(韓非築杜)의 두인가? 곡(谷)은 합 계회 곡(合溪懷谷) 곡인가? 차 신포 곡의 곡인가? 곡신 불사(谷神不死)의 곡인가? 위천 하곡(爲天下谷) 곡인가? 아니면 또한 소달사 곡두의 두인가? 그는 말하기를 아니다 화악산이 구름 하늘 가운데로 우뚝 솟아서 굼실거리며 도사려 영남 고을의 웅대한 진산이 되었는데 정면의 중심에 두골 짜기가 있어서 동편은 평전이라 하고 서편은 봉천이라 한다. 두골 짜기의 물이 아래로 쏟아져 하나의 큰 못을 이루면서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에 에위 싸서 헹하니 깊숙한데 인간 세계는 보이지 않고 다만 위로 하늘해만 높이 떠있을 따름이다. 속어에 골짜기가 끝난 곳을 막혔다고 하는데 막혔다는 말이나 두(杜)는 한 가지 뜻이다. 그러므로 그 땅으로 인하여 이름을 븥인것이다. 나의 선인께서 그곳의 멀찍하면서 조용한 산수를 좋아하여 정자 하나를 세우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골짜기가 이미 세속과 끊어져 막혔고 나 또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으니 나같이 세상에서 버린 물건을 세상 사람들이 버린 곳에 두는 것은 참으로마탕한일이다"라고 하셨는데 불행히도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불초는 감히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한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선인께서 남긴 뜻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 허다한 두곡 의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이리저리 가져와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불끈 일어나 말하였다. 그대의 선인께서는 곧 고려조 두문동의 기풍을 들은 게 아닐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제 보배로운 누대(樓臺)에 금은으로 벽을 장식한 건물이 곳곳마다 바둑알이나 별처럼 많은데도 어찌하여 그런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반드시 궁벽한 절벽 바위 무더기 가운데 새 짐승이나 초목과 짝지어 지냈겠는가? 이는 우주를 초월하여 고금에 통달한 고상한 견해를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만분의 일이나마 방불한 형용을 더듬어내지 못할 것이다. 오호라. 해와 별이 흐릿하게 어둡고 눈보라가 아득하니 내 마음이 띠 플로 뒤덮이고 담장을 마주한 듯 길을 모른 지 오래되었다. 장차 내수 레에 기름을 치고 내 말에 꼴을머여서 이정자 위에서 그대를 따라 손뼉을 치며 고금 통색의 이치를 담론 하면 되겠는가? 오호라. 아아!
강어단알 정묘. 1927 늦은 봄
덕은(德殷) 송증헌(宋曾憲) 기(記)
遠 慕 齋(원모재)
무안면 동산리(원곡) 소재
원모재는 호군공의 6세손 영모재 휘 재정의 셋째 아들이신 찰방공 휘 윤성 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1965년에 후손 재극 재신 재근 등 여러종원들이 뜻을모아 마을남향언덕에 네칸집을 세우고 원모라는 편액을 달았다.
원모재기(遠慕齋記)
밀양의 대항에는 진양하씨가 많이 세거하여 모두 영모재 휘 재정을 조상으로 하는데 공의제3자인 찰방공 휘 윤성은 효우와 문학으로 알려졌다. 그 후손들이 한미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중간에 동산 원곡으로 이사하여 사는이가 열 두어집인데 문헌이 빠진것이 많아서 선대의 일을 단정하지 못하여 한을 품은지 오래였다.
지난해에 재극 재신 재근 등 여러사람이 종중에 의논을 내어 사는동네의 남향언덕에 네칸집을 세우고 원모재라 편액을 달았다.찰방공의 묘소가 동편 10리의 운정산 솔좌언덕에 있고 공의 배위인 연인 정씨묘소가 동편10리의 독산에 간좌언덕에 있어서 여기서 세제의 재계 하는곳으로 하고 또한 일족을모으고 빈객을 맞이하는 두가지일을 겸하기 위함이었다. 금년 겨울에 그일족의 수재인 표진이 내게 상인방에 걸 글을 청하였다.나는 가만히 원모라고 편액을단것은 그 의미가 어디에있는지 생각해 보았다.추모하는 마음은 그소리와 모습이 접촉함으로 인하여 보고 느끼는데서 생겨난다.선조의시대는 이미 수백년이지나 바람결의 음성과 그림자같은 모습이 아득하게 사라졌으니 무엇에 의지하여 멀리 추모하는 정성을 붙일수 있겠는가.하물며 들으니 공의 행적은 모조리 없어져 전하지않으며 단지 효도와 우애와 문학으로 알려졌을뿐이라고 함에라.비록 그렇지만 선조는 후손의 뿌리이다.뿌리가 없어면서 가지가 뻗어가는것은없다.후손들이 매양 그뿌리가 곧 나의 선조임을 생각한다면 저절로 하루라도 잊을수 없을것이다.그러므로 비록 세대가 멀어져 사당을헐어 조천 하더라도 다시 묘제의 예가 있을것이니 이는 하늘의 이치가 사람의 정으로 마지못할일이다.이미 이예를 행한다면 또한 재계할 장소가 없을수없다.제사를 지내면서 재계하지않는다면 어떻게 신이오시어 상하좌우에 양양하시기를 바랄수 있겠는가.이제 하씨 여러사람이 한미한 일족으로 고달프게 애써 이재실을 지었는데 큰 성씨 큰문벌의 사람이 손가락 한번펴서 일을 이룰수 있는것과 비교하면 어찌 지극히 어려운일이 아니겠는가.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휼륭하게 여길만하다.이로 말미암아 할말이있다.대게 추모하는데는 깊고 알음이있다.만약 재계할 장소가 있어서 해마다 한번 지내는 제사를 잘 치루는것으로 추모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여긴다면 모자란다.선조께서 효도와 우애와 문학의 실질이 있었으니 나역시 그효도와 우애와 문학을 본받아 국에서나 당장에서 사모하며 키를 만들고 갓을만들듯이 계승하여 잠시라도 혹 늦추지 않아야 한다. 매양 일족을 모으거나 빈객을 맞이함에 한갖 술잔을 기우리며 한담만 하지말고 때때로 선대의 아름다음을 강론한 뒤에라야 참으로 깊이 사모하는자라고 할수 있을것이다.하씨 여러분 힘쓰시기 바란다.
을사(1965년) 섣달
忌祭祝文(기제축문)
제사는 돌아가신조상님을 잘 모셔야하는 근본이유는 바로 나의 뿌리이기때문입니다.
내가 이세상에 태어난것이 부모님 인해서이지만 그 부모님을 있게하신분이조상님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조상님을 숭배하기위한 의식인 제사를 종교또는 간소화로 인해 안지내는 가정들도 늘어만
갑니다.
유(維) - 이어서 내려오다.또는 이제라는 예비음
세차(歲次) - 해의 차례.세월이흘러 돌아가신날이 돌아오다
삭(朔)간지삭 - 제사달 초하루일진
감소고우(敢昭告于) - 삼가밝게 고합니다.처의 제사는 감을뺀 昭告于.아우 이하는 감소告于 로 쓴다.
현고(顯考)-모시는대상의 손위사람 제사지내는이와의 관계.
학생부군(學生府君)-벼슬없는 아버지또는높인말.어머니 현비(顯妣).할아버지는 현조고(顯祖考).할머니는
현조비(顯祖妣)로쓴다.학생이란뜻은 벼슬없이 계속배운다는뜻입니다.
현비유인(顯妣孺人)-여성일경우 부군 대신 본관성씨를 적습니다.
세서천역(歲序遷易) - 해가 바뀌었다는 의미
휘일부렴(諱日復臨) - 돌아가신 날이 돌아오니
추원감시(追遠感時)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생각납니다.
호천망극(昊天罔極) - 부모의 은혜가 무척넓고 끝이 없으니.불승영모(不勝永慕)는조부이상경우 사모하는
마음이복받쳐 참지못한다는뜻
근이(謹以) - 삼가
청작서수(淸酌庶羞) - 맑은술과 여러가지음식 이라는뜻
공신전헌(恭伸奠獻) - 공경을 다해올립니다.
상향(尙饗) - 음향하십시오
* 빨간칸의 처음칸은 제사지내는 해(음력).두번째는 제사지내는 달의 초하루 일진.세번째는제사지내는 일진.
할아버지 이상일때에는 효자가 아닌 현손 ㅇ ㅇ 로쓴다.
한글축문 예시
ㅇ ㅇ 년 ㅇ월 ㅇ일 효자 ㅇ ㅇ ㅇ은 감히 고하나이다.
아버님 어머님 해가 바뀌어서 아버님의 돌아가신날이 다시오니 영원토록 사모하는 마음과 하늘같이
크고넓은 은혜를 잊지못하여 삼가맑은술과 여러가지음식으로 공손히 전을 드리오니 음향 하시옵소서...
추억속으로 사라져가는 묘사(墓祀)
추억속으로 사라져가는 묘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 주로 10월 보름경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가리킨다.
10월에 지내는 묘제를 달리 칭하는 말로 묘사. 묘전제사. 세 일제. 관행적으로 시제(時祭)라 한다.
묘사 음식을 지게 에지고 이산. 저산 산소 찾아 2~3일 제사를 지낸 우리들의 조상이었습니다.
어릴 때 묘사 지낼 때 에는 묘사 떡을 나누어줄 때 코 묻은 손수건에 받아와서 맛있게 나누어먹었던 기억
들이 남니다.
이렇게 음력 10월은 조상님의 은덕으로 후손들이 잘 있다는 감사의 표시인 것이다.
어찌 보면 조상의은덕으로 추수감사절 일께다.
세월은 흘러 변해 편리함을 따라 좋은 미풍양속인 묘사는 없어져가고 재실에서나 지낼수 있는 시제로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