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곤은 의령 남 씨로써 부친은 곡산 군수를 지낸 남 치산이다.
남곤의 부친은 하비(河備)공(3남 구천공의딸)사위로써 처가인 이곳 한목(대항리)에서 살며 남곤은 둘째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젊은시절 함께한 한목이 남곤에게는 출생지이며 고향인것이다.
남곤의 조부는 사간원 사간 을지 낸 남규. 증조부는 참지 문하부사를 지낸 남을지. 병조판서를 지낸 충무공 남이 와는 족질이다. 남곤은 어린 시절 외사촌인 하충과 더불어 밀양 지동(제대리)에 있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수학하였다.
그는 24세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홍문관 수찬. 홍문관 응교. 부제학 등을 거쳤고 1504년 페비 윤 씨와 관련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귀양길에 오르기도 했다. 중종반정으로 인해 귀양에서 풀려난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유순정. 정광필과 같은 대신들의 총애를 받아 호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중종조 그는 어느덧 훈구파를 대변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의정부좌찬성을 지내면서 다른 훈구파 인사들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암 조광조와 사서 김식등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관직은 의정부 좌의정을 거쳐 의정부 영의정 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고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이후 무고하게 사람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관직과 함께 시호도 삭탈당하였다. 그의 묘소는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에 있어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기묘사화와 곤쟁이젓 대하여*
곤쟁이젓 은 남곤과 심정이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 씨를 사주하여 궁녀를 시켜 궁궐 안과 도성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 개미가 먹게 만들어 주초위왕(走肖爲王) 장차 조 씨(조광조) 왕이 된다는 뜻을 적게 한 데서 그들이 불륜관계에 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세간에 곤쟁이젓이라고 퍼졌다한다. 곤쟁이젓은 남곤. 심정의 한 글자씩 따서 새우젓을 만드는 조그마한 새우를 빗대어 소인이라 의미로 쓰였다.
남곤은 평생을 사치를 몰랐으며 위세를 부리지 않고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의 사화에 발을 담갔다고 하여 조선시대 500년 동안 폄훼되었다. 대항리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남곤의 첩 조운(朝雲)이 귀향을 권한시(사위가 첩이있다는것이 처가로써는 못마땅함?)
증남곤(赠南袞)
富貴功名可且休(부귀공명가차휴)/부귀와 공명은 이걸로 충분하니
有山有水足遨遊(유산유수족오유)/산에서 물에서 즐겁게지내는게 어떠할까
與君共臥一間屋(여군공와일간옥)/단간방하나이면 그대와함께 눕기에는족하니
秋風明月成白頭(추풍명월성백두)/가을바람밝은달과 오래도록삽시다
*삼지당소.남곤의딱밭
남곤의 사후에 간 적으로 몰려 지탄받아 남곤이 태어났다고 하여 대항리 일대 지형이 옥호 동천 행주형(玉壺洞天行舟形)이라고 하여 남곤과 같은 인물이 태어났다고하여 지맥을 끊기 위해 세 곳에 못을 팠다고 한다. 이것이 삼지당소라한다. 지금은 두 곳은 메 위지고 한 곳은 아랫마을 동산 모퉁이에 지금도 남아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북면 대항 2동 457번지 일 때이며 집 주변 은행나무 주변에 집을 헐어 딱나무를 심어다 하여 그 주변을 "남곤의 딱밭"이라 했다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다.
*남곤의 설화*
약 오백여 년 전(1470년) 쯤에 삼각산 산신령이 조선왕조의 국운을 살피기 위해 전국 팔도강산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에 이르자 이곳에서 나라를 매우 어지럽힐 인물이 태어날 징조를 보였다.
그리하여 산신령은 호랑이를 시켜 그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없애도록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호랑이는 여러 산을 쏜살같이 달려 풍각 요제원(풍각은 청도군 풍각면 옛날에는 화악산을 넘어 이길로 해서 밀양과 청도를 이어주는 길이라고 함. 요제원은 밀양 청도면 요 고 저수지 근방)에 이르자 갑자기 중으로 둔갑하여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중으로 둔갑한 범이 대항리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한 선비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이들 일행이 대항리에 이르러 잠시 쉬게 되었다. 선비가 잠시 한눈팔다가 옆에 보니 중은 온데간데없고 저만치 바위 뒤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이상하여 살펴보니 그 호랑이는 자기를 노리는 게 아니라 목화 따는 한 부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선비는 속으로는 겁이 났어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호랑이 앞에 나아가 호랑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기세 등등하던 호랑이가 무슨 영문인지 고개를 늘어뜨리고 돌아서 버렸다. 돌아서는 순간 호랑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방금전애 없어진 중이 그 옆에 다시 서있는 것이다.
중의 변신을 알아챈 선비는 중을 크게 꾸짖었다"너이놈! 네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재주를 피우는고?" 선비의 기세에 눌린 중은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연유를 말하고는 "저부인은 대인을 잉태했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하였다.
바로 이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가 남곤이라 한다.
*남곤과 기묘사화*
밀양에서 점필재 김종직이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자로 평가되지만 남곤은 기묘사화로 인해 많은
후세 사람들이 좋지 않은 평가가 있다. 기묘사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광조(趙光祖)이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깊은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이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 유생 200인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에서 정권을 잡은 중종은 연산군
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는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보수적인 기성세력인 남곤. 이행 등과의 대립하게 된다. 중종반정의 공신들의 공과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는 개혁을 시행하여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나 훈구대신의 미움을 사 결과적으로 조광조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왕에게 밤낮으로 아뢰어 조광조에게 온 나라 민심이 돌아간다고 홍경주(희빈 홍 씨아 버지). 김진. 남곤. 심정 등이 아뢰옵다. 이에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곧 사사되었고 수십 명이 귀양 가고 사형되고 파직되었다.
*남곤. 밀양 한목인 인가?*
한목(대항리)출신으로써 밀양에서 유일하게 일인지하 만인지상 의 영의정을 지냈고 중국은물론 일본과도 외교적 업적을 쌓은 한시대를 경영했던인물.역사의 그늘속에 있는것이 고향을 같이하는 한목인으로써 크나큰손실이 아닐수 없다하겠다.
한목(대항리)은 남곤의 태생지 이고 고향 인것은 분명한사실이다. 그의 부친이 이 곳 한목에 터를 잡으신 하비(河備) 공의 사위로써 처가인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어려서용모가 단정하고 눈에는중동(重瞳)이 있고 남달리 슬기로윘고 약관(弱冠)에 문명이 크게 떨쳤다한다.
외사촌 인 하충(河沖)과 더불어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했다 한다. 사후(死後)에 간 적으로 몰려 태어난 이곳 대항리 한목 에 지맥을끊기위해 못을 팠다고 한다. 두곳은 사라지고 지금도 아랫마을 동산모퉁이에 이끼낀체로 남아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한다. 57세 사는동안 어려서살고 이후에 한목에 귀향했다는 기록은 없다. 의령인으로 분류되는것이 안타까움 인것이다.
관직 중에 사람됨이 단중하고 독경(篤敬). 공손. 청검하며 문장은 풍부하고 화려하여 근세에 으뜸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외가인 한목에 살았다고한다. 지금은 대항리 457번지 지금은 은행나무일대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사후에 딱나무를 심었다한다. 지금은 흔적도없다. 밀양 출생자로서 유일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 평가가 다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의 것.그러나 분명한것은 남곤의 고향은 한목인것이다.
남곤이야기(아래 영문주소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