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 祖
진양 하 씨 시조는 고려 현종 조의 충절신으로 문하시랑 평장사에 추종된 하공진(河拱辰) 공이다. 공의 순절로 인하여 진주가 충절의 고장으로 칭송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거란과 갈등. 여진과 갈등 대몽항쟁 등으로 정말 많은 전쟁을 겪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때 유명한 서희의 담판을 통해 얻은 강동 6주를 요새화 하여 전란을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한 공 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은 진주 출신으로 성종 시기 994년 "압강 도구 당사"에 임명되었습니다. 목종 때에는 "상서 좌사낭중" 역임하였다. "압강 도구 당사"는 고려에서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에 설치된 요충지를 관할하는 관직입니다. 공은1009년(목종12)목종이 궁궐의화재로 상심하여 병이들어 중량장 으로써 친종장군 유방.중량장 유종,탁사정과 함께 침전의 문 가까이에서 늘숙직하는일을 하였다.서경도순검사 강조가 무장한 병력을 거느리고 정변을 일어키자. 탁사정과함께 강조편에섰다.
강조가 정권을잡은후 상서좌사낭중 이되었다. 1010년(현종1년)에 동서양계를 지킬때 동여진 촌락에 진군
하였다가 패한일로 유배를당하였다.거란은 고려를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된 목종을 명분으로 요나라는 40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하는 제2차 전쟁이 시작됩니다.이때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강조는 30만 대군을 일으켜 방어했어나 참패하여 평양과 수도 개성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에 고려 현종은 강감찬뜻받아들여 하공진.고영기 등의 20여명 인원으로 전남 나주로 피난을 갑니다. 이때 하공진은 목숨을 건 승부수를 두게 됩니다.맨몸으로 철수교섭을 자청하여 거란군성종을 만납니다.
하공진 공의 충심의 승부수
당시 요나라 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했지만 후방에서 여전히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있고 고려왕 현종이 멀리 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일단 철수하는 강화를 맺어 40만 거란군을 철수시켰습니다. 하공진.고영기와함께 스스로 인질이 되어 고려의 강화 의지를 피력하여 시간을 벌어 사태 수습하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요나라군이 회군하고 1차 전쟁 서희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 반환 요구 이어집니다. 포로로 잡혀간 공에게도 회유가 있었습니다. 볼모에도 고려에 충성심을 잃지 않고 탈출을 꾀하다가 탈출 실패한 공을 감시하기 위해 그를 연경으로 옮겨 양가의 딸을 결혼시켜 감시케 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준비하여 탈출을 시도하다
국문을받게되었다.거란왕은 온갖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뿐아니라 그자리에서 나는 고려인이라고 되뇌일뿐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1011년 12월 결국 공을 처형되고
말았다.이때 하공진은 고려인으로서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으며 기꺼이 죽음을 택했습니다.살해된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도 하였다. 훗날 고려 현종은 그의 충심을 기려 상서 공부 시랑(尙書工部侍郞)에 추증했습니다. 이후 문종6년(1052) 하공진의 최후는 살신구국의표상이 된다하여 문하시랑평장사 에 추증하고
공신각상에 공의영정을 모시도록 하였다.
진양 하 씨 유래
진양 하 씨의 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세종실록 지리지나 진양지에 따르면 삼한 때 진주지방의 토성이 넷인데 하 씨. 정 씨. 소 씨. 강 씨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은 참고할 자료가 없어 알 수 없고 진주인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하씨성의 인물은 고려 성종. 현종 연간의 하공진 공이다. 문충공 하호정 선생께서 조선 정종조에 정사공신 1등을 태종조에 좌명공신 1등을 받으시고 태종 16년에 선생의 선친 진양 부원군 하윤린 공의 신도비를 세우셨는데 춘정 변계량이 지은 비문에 그 선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전략....... 대조가운데 고려 때 벼슬해서 좌 시낭 중을 지낸 휘 공진은 현종 때 공훈이 있어 문하시랑 중서 평장사에 추증되었다...... 후락....... 진양 하 씨 문하시랑공파 가 공진 공을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 이에서 그 영원을 찾을 수 있다.
진주를 관향으로하는 하 씨에는 고려 정종 연간에 사직을 지낸 하진 공을 시조를 삼는 사직공파와 고려 중엽에 주부를 지낸 하성 공을 시조를 로 삼는 단계 공파가 있다. 사직공파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종 묘정에 배향된 경재 하연 선생이 있고 단계 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의 한분인 충렬공 단계 하위지 선생이 있다. 이상 세파는 필사 동원이지만 분파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각각 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1451년에 경재 하연 선생이 쓴 진양 하 씨 족보서에서도 필시 동원이지만 분파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 외 하 씨로는 강화하 씨. 안음하씨 등이 있다고 하나 대체로 진양 하 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하 씨 관향을 진양으로 한 것은 조선조 태조가 진주목을 진양 대호부로 개칭한 데서 유래한다.
문하시랑공 파명(문정공계열)
시조 | 2代 | 3代 | 4代 | 5代 | 6代 | 7代 | 8代 | 9代 | |
河供辰 | 칙충 則忠 |
탁회 卓回 |
정재 挺才 |
남수 南秀 |
소 邵 |
부심 富深 |
식 湜 |
시원 侍源 |
문정공계열 |
거원 巨源 |
병판공계열 | ||||||||
10代 | 11代 | 12代 | 13代 | 14代 | 15代 | 16代 | 17代 | 18代 | |
윤린 允潾 |
륜 崙 문충공 |
문충공파 | |||||||
윤구 允丘 |
유 遊 판윤공 |
지혼 之混 한성소윤 |
|||||||
지돈 之沌 연안부사 |
부사공파 | ||||||||
지명 之溟 |
현 現 |
응천 應千 |
형 瀅 |
희서 希瑞 |
면 沔 |
수일 受一 호.송정 |
송정공파 | ||
천일 天一 호.수궁재 |
수궁재파 | ||||||||
인서 麟瑞 |
락 洛 호.환성재 |
환성재공파 |
항 沆 호.각재 |
각재공파 | ||||||||
영생 永生 호.양호재 |
양호재공파 | ||||||||
비 備 호군 |
구천 遘千 |
호군공파 | |||||||
치천 値千 관.사과 |
사과공파 | ||||||||
저 著 |
서천 瑞千 |
백 伯 어모장군 |
어모공파 |
시랑공파 후손
조선태종 때 영의정 하륜
하륜(河崙.1348~1416)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며. 고려말 정몽주.남은.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
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항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중국의 홍무제가 문책하자 명나라로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1398년 제1차 왕자의난과 1400년(정종2년) 제2차 왕자의난때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좌의정부사를 역임하고 1414년(태종14)에는 영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 에 임명되어. 왕명으로 목조.익조.도조.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해 함길도에 갔다가 한성으로 되돌아오던 도중 정평군 관아에서 돌아가셨다.저서는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락 등이있고. 가사는 도인송도지곡.수명명 등이있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문충공파 파조이다.
하륜의 묘는 진주시 마천면 오방리 야산에 조부모.부모묘4기는 봉분이 장방형이고 하륜의묘는 팔각형의
독특한 형식으로 조선초기의 무덤형식을 알수있다.경남기념물제41호이다.
묘소 제일위에는 9대손 휘 시원(侍源)묘 부터 배위진양정씨. 10대손 윤린(允潾) 배위진양강씨 묘가 차례로 상하로되어있고 맨아래 에는 하륜의 묘가있다.
오방재(悟坊齋) 는 진주시 마천면 오방리 에 위치해 있는데. 하륜의 조부인 진강부원군 하시원 과 아버지
하윤린 그리고 진산부원군 하륜의 묘사를 위한 재실이다. 기문(記文)에 의하면 1450년 대에 창건된것으로
추정되며.창건자는 남명 조식의 생질인 신암 이준민(1524~1591)이다.
밀양 대항리 진양하씨 세거지
대항마을은 밀양시에서 북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진양 하 씨 문하시랑공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550년 하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곳 부북은 밀양도후부 의 치소 인 읍성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곳이며 대항은 밀양의 진산인 화악산을 북으로 하고 서쪽에는 허항 산 형재봉 명방현으로 이어져 다시동으로 구부려져 동구 쪽으로 감싸고 있다 남쪽 멀리에는 중난산이 바라보이며 화악산 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하다고 하여 옥호동천행주형 이라 찬미했다고 하고 일명 수동(一名壽洞)이라고 하였다. 40여 호의 종원들이 선조의 청득을 이어받아 예와 덕행을 중시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다. 시조공의 16대손의 호군 하비 공 께서 단종의 선위 사건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수동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하다가 외가가 있는 이 곳 대항으로 전거 하여 55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유수한 효열 잠영이 속출한 진양 하 씨 집성촌이다. 마을을 지나 몇 걸음 오르면 화악산 산자락에 웅장하고 날렵하게 보이는 영모재가 우뚝 서있다. 입향조인 호군의 육 세손인 재정이 선조 임진 1592년에 경북 청송으로 8년간 피난 갔다가 귀향하여 음관으로 내금위 부사 정을 지냈다. 영모재 공 재정은 임란 때 여읜 부모를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으로 1599년에 초당을 짓고 공의 호를 따서 영모재라 재액을 붙었다. 이후 1859년. 1914년 두 차례에 중수했으나 영구 경비(永-길영.久-오랫구.傾-기울어질 경.圮-무너질 비)하여 1956년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칸 규모의 팔 작형 지붕을 올린 영모재는 종중 행사나 종원들의 재숙 소이다. 호군 공께서 입 향한 이래 번성하던 종족이 실종되거나 참화를 당하고 하비 공의 6 세손 영모재 공 재정한 분만 생존하였다. 550여 년이 역사를 이어온 현재 대항의 하 씨 종원은 모두 영모재 공의 후손이다, 호군 공이 입 향한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항은 학풍과 문한이 많이 배출된 곳이며 선조들의 문집과 많은 문헌들이 전해오고 있고 선비들의 유향이 배어 있는 곳이다.
호군 하비(護軍 河備)비문
진강 부원군 문정공 하시원(侍源)의 현손이며 통정대부 부윤 하윤구(允丘)의 증손이고 한성판윤 하유(游)의 손자요 초계군수 하지명(之溟)의 아들이다. 진주 수곡면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하다가 외가가 있는 밀양 대항으로 전거 하였다 공은 오위(五衛) 부사직을 지낸 후 선략장군 호군에 특제되었으나 1455년 단종 손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호군 공파의 파조이다. 밀주의 대항리는 우리 하 씨가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 하 씨가 거처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호군 공에서 비롯되었다. 공의 휘는 비(備)이고 단종조의 사람이다. 진양에서 태어나 만년에 밀양에 이거 했다. 이곳 한 목에서 돌아가셨으며 한목 동쪽 구대곡(九岱谷) 명당에 장사 지냈다. 공은 배위 곽 씨의 묘는 진주의 효자동에 있다. 대저 임진란 때 밀양은 마침 그 충돌지점에 위치하여 공의 후손 들응 전전하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문헌 또한 소실되었기에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아! 통탄스럽도다. 우리하씨 계통은 진양에서 나왔고 고려 증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을 시조로 삼는다 이후로 대대로 잠영이 이어졌다. 8대에 이르러 휘 식은 판사 평 부사와 진강 군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휘 시원 은 우의정 진강 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문정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부 휘 윤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냈으며 조부의 휘 유(遊)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아버지 휘 지명(之溟)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고 어머니 숙인 재령이 씨로 안렴사 일신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15~16세에 이르러서는 시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관직은 선략장군 호군에 이르렀고 관직에 있을 때 의리로 스스로 격려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에 단계 하위 지공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당시의 일에 미치자 강개 하여 오열하였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평생의 큰 줄거리다. 배위 영인 포산 곽 씨는 의영 고사 득종의 따님이며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구천은 생원으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도의로 사귀었다, 차남 치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과를 지냈고 3남 수천은 수찬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찰방을 역임하였다. 딸은 이숙정. 전맹원. 정원종. 남치 신(남곤의 부). 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구천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주는 현감 을지 냈고 차남 충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호는 돈재라 하고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3남 순은 진사이며 4남은 벼슬하지 않았다. 딸들은 이희적. 손난 줄. 어득호. 민여익 에게 출가하였다. 치전의 아들 풍 은 문과 현감이고 개(漑)는 참봉이다. 수천 의딸은 이구 년. 이광로에게 시집갔다. 주(澍)의 딸은 점필재의 손자 김륜 에게 시집갔다. 충의 아들 종영은 참봉을 지냈고 종억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으며 호는 낙포이다. 딸은 유방 춘. 장심에게 출가하였다. 순의 아들 종수는 참봉을 지냈으며 영의 아들은 종헌과 종서이다. 풍의 아들 종악은 진사이고 차자는 종암이다. 개(漑)는 종무. 종계 두 아들을 두었으며 딸은 신경심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은 일찍이 불행한 시대를 관리로 더 이상 나아갈 뜻이 없었으니 향리에 물러나 가업을 세웠고 화락하고 단아함을 백세에 흐르게 하였으니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공은 본래 역경과 풍수지리의 학문에 정통하여 한 목에 거처를 정하였다. 처남 해남 현감 곽안방 공이 와서보고 감탄하면서 칭찬하가를 "이 땅은 자손만대의 복 받을 터가 되기를 충분하도다. 남천의 물이 말라도 하 씨는 없어지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니 공이 베푼 은덕의 무궁함과 우리하씨 자손의 경여와 오래도록 발전함으로 가히 징험이 된다. 공의 후손들은 흠모와 감격으로 칭송이 그치지 않은데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며 이어 명을 짓는다 명에 이르되 "아! 이곳 수동이여 훌륭하신 공이 터 잡은 곳이로다. 좋은 사람의 복 받은 땅이라. 그 후손이 이리 번창하도다. 후인의 엉긴 정성을 비석에 새겨 추모의 정을 붙이오니 영원한 향불에 영혼의 오르내림이 양양 하소서"
임인년 3월
후손 재용(載用) 삼가 짓다.
영모정 하재정(河再淨)
자는 응회(應會).호는 영모정이다. 생원 하구천의 현손이고 사헌부 집의 돈재 하충의 증손이며 생원공 낙포 하종억의 손자요. 진사 하유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밀양을 거쳐 북상하게 되면서 대항마을 하 씨 종족(宗族)은 거의 참화를 당하거나 실종되었는데 당시 18세의 나이였던 공이 홀로 상아 남아 청송 땅으로 피난하면서 그 와중에도 나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시를 읊었는데 그 시문이 전해지고 있다. 7년간의 전란이 끝나고 귀향하던 날에 공은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죽어간 친족들에 대한 서글픔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뒷산 언덕 선산의 옛터에 재실 을지어 영모라 편액을 걸고 그 뜻을 서술했는데 그것은 어지신 돈재 공과 그 아드님 낙포 공을 추모함이었다. 벼슬은 내금위 부사 정을 지냈다. 배위 경산 전씨 는 장사랑 초복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구는 찰방이고 차남 윤경은 감정에 추증되었으며 3남 윤성은 찰방이고 4남은 윤방이며 사위는 밀성인 손각이다. 묘소는 대항 별묘등(別廟嶝-불미등) 임좌에 쌍분이고 은진 송재직 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초계(지금합천)군수 하지명 묘와
草溪郡守 河 之 溟 墓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산41번지에 초계(합천)군수를 지내시고 하비공파 아버님이신 휘 지명 무덤이있다.
묘의 상.하 봉분은 팔각형으로된 둘레돌을 만들어 봉분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것을 막는다.
특히 덮계돌은 마치 석탑의 지붕돌과 같은형태로 모서리가 살짝위로 들려있어 특이한 모습이다.지석과
상석.문인석.장명등이 갖추어져 있고 축조시기가 확실하여 당시의 묘제를 잘 나타내고있다.
호군공 하비 배위 포산 곽씨 묘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산41번지에 있다. 팔각형의 둘레돌이 돌려져있는 무덤은 하비공의 부인인 포산
곽씨 의 무덤이며 팔각으로 호석을 두르고 각모서리에 기둥을 세웠으며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 조선초기
묘제의 특징을 잘나타내고 있다. 하비공의 무덤은 밀양 대항리에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하공진 편 (아래주소를 눌러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_ZkhCHWMg4&t=24s
제2차고려 거란전쟁(하공진)
양규와 하공진 나라를살리고 죽음을 맞이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PQjjwRA99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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