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때는 풀. 나무(초근목피)가 간식이었다오.
60년 전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들의 추억에 젖어보려고 합니다.
아무턴 그때 추억은 왜 오랫동안 생각이 나는 것인지...
봄이면 둿산 맷돌바위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입이 시퍼렇게 물들일 정도로 참꽃을 먹고 또 한아름
꺾어 집에다 꽃아 두었던 기억이 나는 건 나이 탓인가.
▲참꽃-진달래는 참꽃 또는 두견화이라 하며 조금 독성은 있지만 기관지에 좋다 합니다. 철쭉꽃은 먹지
못한다 하여 개꽃이라고 했다고 하네요.
봄이면 멋모르고 먹었던 생각들이 새록새록......
▲띠(피기).잔대뿌리-"띠"라고 초봄에 논둑. 잔디밭에 자라는 풀인데 이것을 뽑아 까 보면 하얀 솜틀 같은 것을 먹었던 것이 조금 달달한 기억이 납니다. 뿌리는 잔대뿌리라 했던가? 대나무 뿌리 같은 하얀 뿌리도 먹어 고요. 이것이 뻘기. 빼기. 삐비.경상도에서는 띠라고 하네요. 이것도 우리 간식거리 지혈. 이뇨에 좋다고 하네요.
▲송기-소나무 햇순 밑에 1년 자란 나무를 꺾어 낫으로 껍질을 까서 나무에 붙어있던 속껍질을 질겅질겅 껌처럼 씹고 다니던 시절 무슨 맛인지? 솔잎 맛밖에 안 나는걸?. 뇌졸중에 좋다 하네요. 거기서 1년을
자라지 못한 소나무에게 지금에서야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이것도 우리들의 간식거리...
▲찔레순-하얀 찔레꽃을 피우기 위해 나온 햇순을 따다 가시가 있는 껍질을 벗겨 풀냄새 나는 순을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혈액순환에 좋다 하고요. 그런데 모두 약효가 있다고 하는데 어려서 먹은 이것들이 지금까지 효능을 발휘 못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무의 저주인가 생각되네요. 어려서 먹었다고 건강에 과신 말고 건강하게 삽시다.
▲칡-가을이 지나고 겨울이오면 농한기가 되지요. 칡은 겨울이면 영양분이 뿌리로 간다고 하네요. 늦겨울에 칡의 뿌리에 물오를 때쯤 칡을 캐러 산을 뒤지서 캐서 입술이 시커멓게 하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군요. 자양강장제. 갈근. 발한. 해열에 좋다 하네요.
▲찔레 열매-하얀. 붉은 칠레 꽃이 피고 지면 빨간 열매가 매달리지요. 새들이 좋아하는 겨울 음식이지요.
겨울방학쯤이면 이 열매를 꺾어 열매 반을 잘라 그 속에 사이나(?) 집어넣고 산에 토끼 길목. 뀡길목에 꽂아 놓고 오면 그 이튿날 가면 죽은 산토끼. 뀡을찿아와서 내장을 꺼내고 국도 끓어먹었던 모처럼먹는 단백질이었던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큰일 나요.
▲딩기-배고프고 어려울시기 였던 어린 시절엔 먹을 것이 없어 고운 쌀 등겨에 시래기를 넣어 죽으로 끊여먹던시절이 있었답니다. 경상도말로는 딩기 떡. 또는 개떡 이라 했던가? 입이 거칠었던 기억. 먹기 싫어도
배고파서 먹었던 시절.
▲갱죽-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많은 식구들의 끼니를 때울 때 흔히 해먹던 음식이다. 양식을 조금이나마 절약하기 위해 남은 밥이나 곡식 등에 김치나 배추 콩나물 등의 채소류를 듬뿍 넣고 멀겋게 끓여서 먹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추울 때 별미로 먹네요.
▲수제비-나이 들어 수제비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난이다. 힘들었던 시절의 상징이다. 625 이후에 원조 밀가루 받아 끼니를 잊게 해 준 음식이 수제비다. 지겹도록 먹은 마음 찡한 추억이 서린 음식이다.
요사이는 칡. 감자. 보리. 겨. 송기 수제비가 나와 이 또한 별미음식이네요.
▲국민학교급식시간-월사금도 못 낼 정도의 그 어려웠던 시절에 아침보리밥 한그릇먹고 10리길 학교를가서
네시간 수업하다보면 뱃가죽이 등에붙을것같은 허기를 느낀다.그렇게 맞이한 점심시간이면 빈도시락을 가져왔어 원조음식이었던 강냉이죽 한그릇이나 옥수수빵 한덩어리 가 전부였으니 한참자날 나이에 그것이
영양분의 전부였으니 요사이 아이들처럼 키커지않고 마른아이들밖에 없었다. 하교후 점방앞에 지날칠때면
용돈이라고는 받아본적없는 언감생시 눈깔사탕.빵들은 눈요기에 불과했다.돌아오는길에서 삐기.띠.칠레순이
유일한 주전부리였다.
▲국민학교 청소시간-학교 마룻바닥을 초 칠 해 가며 반들반들하게 문지르며 청소하고 유리창 닦았던 국민학교 시절 특히 장학사 같은 분이 오면 더욱 청소 잘해야 했던 그 시절. 마루판 바닥 사이에 잃어버린 연필은 어디로 갔는지?? 선생님청소검사후 집에갈시간이면 천으로만든 책보자기를 여자애들은 허리에메고
남자애들은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는 신작로를 따라 달린다.어쩌다 차가지나갈때면 그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차를따라 넵다 달린다.
▲국민교육헌장-학교 가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오지 않으면 뒤지게 손바닥 맞았던 기억. 머리가 안 좋았던가 봅니다.
▲감꽃-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봄 오월이 되면 노란 감꽃이 피면 동네 아이들은 감꽃을 주우려 이른 아침부터 바쁘진다. 주로 땅에 떨어진 것들을 벼 포기 부분 짚에다 끼 위다가 먹곤 했다, 동트기 도전 아침 일찍 이웃집으로 사맆문을 살짝 열고 들어서면 태동할배는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무슨 맛인지 아무 맛이 없다. 그때는 왜 주어 모았는지 모르겠다.
▲엿장수-지게에 엿을 진 엿장수는 외팔이였다고 생각된다. 헌 고무신이며 빈병 같은걸 갖다 주면 엿을
주곤했다. 엿이먹고 싶어 멀쩡한 어머니의 외출용고무신을 엿으로 바뀌 먹고 엄마한테 얻어맞곤 했다.
엿을 뿌려터려 누가 기포구멍이 큰가를 엿치기도 하였다.
▲으름-양수받이 논길 옆 아카시아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등줄기 나무 으름나무가 있었다. 가을이라 생각된다. 익으면 쩍벌 어진 게 아주 달고 맛있다.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냥 한국바나나 라 해두자. 성질 이차고 열을 낮추고 진통효과가 있다 한다. 옛날에는 임신중절용 으로 사용했다 한다.
▲깨금-큰 나무도 키가 그리 크지 않는 애들키만할까? 깊은 산이면 흔히들 있다. 9월쯤 소먹이로 갈 적에 주로 간식이며 주먹반만 크기에 껍질을 까면 땅콩만 한 크기이며 상당히 고소하고 밤맛이난다. 깨금열매를 입으로 깨어먹으면 그소리에 도깨비도 도망간다는 전설이있다. 지방과 단백질이 많다. 한방에서는 기력 회복.
위장. 식욕부진. 현기증에 처방한다 되어있다.
▲산딸기-흔히들 복분자라 하며 돌이 많은 곳에 잘 자란다. 그곳에는 뱀이 많다 하여 조심하여 따먹곤 했다.
딸기주위에 뱀이 많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양기를 복 돋어주고 신장에 좋으며 나트늄배출에 좋다 한다.
▲뱀딸기-땅 딸기라 그랬나. 떫은맛 쓴맛도 아니고 주로 맛이 없다.
성질 이차고 침 이 계속 올라오고 설사를 할 수 있다.
▲다래-깊은 산속에 자란다 조금 달달하다. 말려서 한방약으로 쓴다. 잎은 중풍. 신장염. 간질환 에쓰며 열매는 당뇨에 쓴다.
▲오줌 싸게-나는 늦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보다. 7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아침에 우리 엄마가 키를 쉬어 둿집 요암아저매 집에서 소금을 얻어 오란다. 그때 마침 아침을 푸다가 주걱으로 빰을얻어맞고 빰에붙은 밥풀붙히며 울면서 소금을 얻어온 기억이 생생한것은그 창피함이 60살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 이후로 신통하게도 오줌을 안 싸다고 한다.
▲목화 열매-햐얀솜이 열매이며 이것을 어린 열매라 부른다.
익으면 솜털이 되어 솜이불. 솜옷을 해 입었다. 지금은 자연 솜은 아토피 등 피부병 예방에 좋다.
열매가 피기 전에 열매같이 생긴 것을 따 먹기도 했다. 조금 달달하며 물이 많아 갈증해소로 먹었다.
▲오디-뽕나무에 자라는 오디는 달달하다. 주로 약재로 많이 쓰인다.
이뇨작용. 진해. 강장작용. 어지러움증. 당뇨병. 동맥경화증에 쓰인다.
▲메뚜기-지금은 농약으로 그의 없어졌지만 라때에는 메뚜기가 볶아먹으면 고단백 식품??
얼마 전 맥주집 맥주 안주로 나온 걸 보고 이것이 어디서 왔는지 물어니 안주 집에서 쥤단다???
▲달구지(소구루마)-라때는 소가 끄는 나무로 만든 달구지가 운송수단. 볏짚. 볏가마. 지금은 차로 운송했지만 그때는 소가 큰 일꾼이고 집안의 큰재산이었다.
▲학교생활-고등학교 학교생활에서는 교련시간이 있어 제식훈련. 총검술. 각개전투 등 군사훈련도 했다.
교련선생은 예비역 중위나 대위들이 대부분이었다.
등교시간에는 교문 앞에서 생활부가 있어 복장 단속 두발 단속 등 하며 거수경례를 하며 통과하곤 했지만
복장불량 애들은 기합을받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 없어졌던군요.
▲아이스께끼-지금은 아이스크림 사라져 버린 아이스께끼 색소 사카린 물 얼린 얼음과자
▲산머루-그때에는 야산에 많이 자생하였다. 익기도전에 시큼한맛이 눈을찡글리게 하는맛 익어면 달다.
▲소먹이로가는길-여름방학이면 소먹이로 가는것은 당연히 아이들의 몫이였다. 아침부터 불미등 에묶어놓은
소들을 그늘밑에서 소엉덩이에 피를빠는 가분다리를 잡는데 몰두하곤했다.소는 시원했는지 큰눈을 지그시감고 꼼짝도 않고 섰다. 점심먹고나서는 소들을몰고나와 줄지어 산으로향한다. 소들은 가다가 길가에 심어둔 콩잎을 잽사게 한잎입질을한다. 휘모안.성지골.금박골.팔방제 등으로 먹이려 다녔다.산에가면 고삐에
매어진 줄을 양뿔에 단단히 감아야했다. 그리곤 산으로 올려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저수지.냇가에가서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물놀이하며 보낸다.매일같이 물놀이 하다보니 헤엄솜씨가 늘어 웬만한 못을 거뜬히 가로
질러 건넜다. 팔방재 로가면 건너 팔방동 애들과씨름도 하곤했다.그리곤 복숭아 서리를가서 들켜서 온산에 숨어 아래 위로로 몰린적이있다. 그리곤 산그늘이 깊게 깔리면 소를찿으려 가면 정신없이 풀을뜯던 소들은 아이들이 모는방향으로 우르르 몰려 내달리기 시작한다. 가끔 소를못찿아 밤새 방울소리 들리는곳을 찿아 헤메곤했다. 여름한철 소울음소리 방울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가득했던 그산에는 그소리가 사라진지
오래다.수풀만 우거져 흔적도없이 사라졌다.
▲모내기-식전부터 모를찌며는 아침먹고는 놉을 해논 일꾼들과 모내기를 시작한다.
일렬횡대로 줄을서서 못단에서 한웅큼씩 떼어내 못줄에있는 빨간비닐표시지점에 모를 손으로 심는다.
다 심게되면 "어이"하며 못줄잡은 사람의 목소리에따라 모간격만큼 옮기며 심는다. 손놀림이 빠른사람은
모를 심고 허리를 펼수있지만 일손이 느릿한사람을 도와쥐야 해야하므로 옆사람을 잘만나야한다.
엄청 허리가 아프다.옆논에는 소를 이용하여 쟁기질하며 써래질하며 모내기에 동네사람들이 놉을하여
모내기를 하던 모습이 이양기로인해 사라졌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무리 발전되어도 모내기만큼은 기계로
할수없다고 하셨는데?...논두렁에 걸터앉아 새참.점심밥먹은 기억이 새록새록...
▲옆집감나무-옆집 태동할배집 에는 그때귀한 대봉감나무가 있었다. 그감은 조금만 누렇게 익어도 다른감과 다르게 맛있어다고 기억된다. 그나무가 상당히 크서 1/3이 우리집으로 가지를 뻗어 넘어왔다. 할배 몰래따먹다보면 가을이면 우리집쪽에는 감이 그의없다. "허허" 이놈들 많이도 따먹었군아"하는 그야단도 그립다. 그러나 지금은집도 사라지고 감나무도 베어지고 없었다.
추억은 흔적이 사라질수록 그리움만 더해가는 모양이다.
▲호롱불-우리의 유년시대에는 전기가 들어오지않았다.
그때 기억으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을때 국민학교 5~6학년 69년.70년쯤 전기가 들어왔다고
생각된다.호롱불 밑에 조금만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 고양이 놀이도 하고 어두운 등잔아래 머슴들은
새끼꼬며 우리들은 만화책에 열중하다보면 머리카락도 태위먹은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하면 코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나왔다. 조금잘사는집은 초 나 호야 로 밤을 나곤했다. 전기 가
들어오고 나서는 5촉 짜리 백열등에도 왜그리 밝은지 대낮처럼 느껴졌던시절.살아가면서 점점밝은
30촉백열전구를 쓰기도하고 형광등1개에 벽구멍을뚫어 2방을쓰기도하고 전기요금을 아끼려 많이
노력했다.그래도 어둠은 몰랐다.등잔불보다 휠씬밝기때문이었다.
▲마지막중학교 입학시험-우리가 중학교시험이 마지막이었다.국민학교를 1970년에 졸업했다.
그 이듬해 부터 소위 뺑뺑이라 해서 무시험으로 중학교를갔다. 국민학교6학년이면 새벽6시에
그큰보따리(책보따리.그때는책 가방이없었다) 어깨에 둘러메고 보충수업을하려갔다. 도시락은동생이
2개 가져온다. 새벽2시간후 아침을먹었다. 또 그리고 방과후 보충수업을했다.아마 저녁6~7시에
끝났다고생각된다. 그때는 이 고생이 중학교가면 해방될것같았다. 월사금도 못내던시절 중학교
못가는애들이 부러웠다.학반60명중에 10%정도는 못갔다고 생각된다. 6학년 담임이셨던 이봉수
선생님은 얼마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당히 무서웠고 엄하셨다. 매달시험 볼때는
성적 하락이면 손바닥에 불이났다.그래서인지 밀양에서 명문중으로 통하는 밀양중학교를 한반
에 40명 정도로 합격시켜 월산국민학교가 명문학교로 이름이있었다. 1차에 떨어지면 2차 밀성.세종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 시절이 그리운데 해마다 열리는 동창회는 한번도 가지않았다.무어가 그리
빠쁘지도 않으면서 못갔는지 혹시나 어린얼굴이 늙어 알아볼수는 없어면 어쩌나 이름표를 달고나
가야지 하면서 60중반이 넘었다.
▲망개-가을에 빨갛게 익은열매는 겨우내 매달려 있는데.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실제 먹어보면 시큼하고
닝닝해서 맛이없다. 그래도 재미로 따먹기도 했다.새들이 좋아하는걸 굳이 우리가 먹었으니....
가시가 있고 구불구불한 넝굴에 하트같은 잎이 달려있는데 그표면이 매끄러위 잎을 따다가 접어 시냇가의
물을 떠먹는 표주박였던것이다.뿌리는 꼭 생강같으며 녹말이 많다하고 샤포닝이 많아 구황식품이라한다.
잎은 방부.항생기능.중금속독성제거.이뇨.거풍.관절염완화에 좋다한다.
▲밀서리(밀사리)-
밀서리는 아직채 여물지도 않는 밀을꺽어 불에 구위먹어면서 허기를 달래던 보랫고개로 상징되는 아픈기억중의 하나다. 밀서리를 하면 주둥이가 완전 시커멓게 검댕이가되고 돌아다니곤했다. 지금은 세월이변해
절도죄로 형사처벌받지만 밀서리 하다가 경찰에 잡혀가 일을 치르더라도 그시절로 돌아가고싶다.
▲이스라지(산앵두)-길가 가장자리나 계곡가에 잘자란다. 크게 맛은없고 시큼달콤 하다고나할까.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예쁘서 따먹었나싶다. 장염.당뇨.천식.위장병의 악효가 있다하네요.
▲겨울철땔감(나무하려가기)-겨울구둘난방.소죽끓이기.취사 를 하기위해서는 불을 지펴기위해서는 꼭
해야 만하는 땔감이 필요했다.볏집.고추대.콩대로도 했지만은 농한기 겨울방학 때에는 나무를 하려
다녔다. 이미 가까운 마을둿산의낙옆들은 반들반들 할정도로 긁거가고 없었다. 그래도 우리동네는
골짜기이므로 아랫마을 사람들이 때를지어 2~30명씩 나무하려 올라올 정도였다.
솔잎인 깔비라 그랬라? 칼퀴로 차곡차곡 해야만 잘뭉쳐져 아래위 솔가지나 나무를 놓고 새끼 로
3~4줄정도로 묶어야만 중간에 뿌러지지않는다. 오전에 한짐하고나서 오후에도 또한짐하려 이제는
톱을가져가 깊은산속으로가 장작용으로 생나무를 잘라오기도 했다. 생나무는 무게가 상당하므로 언덕에
작대기를 받혀 쉬엄쉬엄 내려 오는 기억들이 납니다.그나무를 도끼로쪼개 땔감으로 온산이 민둥산이 되어 산림녹화하고는 먼애기추억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성묘갈적에 죽은 나무들 너무많아 그때를 생각하면
아깝다고 느껴 집디다.
▲소죽(쇠죽)끓이기- 날씨가 추위지면 소들은 여름같이 생풀을 못먹으니 소죽을끓여줬다.
짚빼가리에서 짚단을 서너단을 빼내와서는가을에 걷어놓은 고구마줄거리를 작두에썰었다 작두는 상당히
위험한것으로 한사람은 끈을땡기며 발로밟고 한사람은 짚을밀어넣는다.두사람이 호흡이잘맞아야한다.
.작두에손가락이 잘린사람도 꽤있었다.그여물을 콩깍지.고운등겨등을 넣고 부억설겆이.쌀씻은물등 모아둔 구정물로 소죽솥에 붓고는 김이날때 까지 부지깽이로 땔감을저어며 불을땐다. 김이날때면 꽤구수한 냄새
가난다. 소죽솥은 주로 아랫 사랑채에 있다.아침 저녁 불을때니 구둘방장판에 검게탄 흔적도 있다. 그때는 세수물이 더운물이 필요하면 양은세수대야에 물을담아 소죽위에 올려놓어면 그물한바지에 찬물두바가지
로 고양이세수하면 몇사람이세수하곤했다. 설날때쯤이면 소죽솥에다 물을데위 손발에누릉지같이새카만
때를씻기위해 솥에들어가 목욕하곤했다. 1년에 한두번쯤있는이야기이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샤위하지만....나는 꽤나 목욕을 싫어했나보다 누이가 씻겨줄려고 하면 도망다녀서 한 5km정도 쫓아와서는 잡아
가는 독한(?)누이덕에 그나마 깨끗히 명절을 지내곤했다.
소들은 소죽을먹어며 그선한 눈으로 껌뻑이며 금방 한바케쓰를 닭들과함께잘먹는다. 저녁때에는 닭들도
자기집인 닭장은 짐승들이공격못하게끔 1m높이쯤있다.그길올라가는 사다리인 나무두개에 새끼를둘러
암닭들은그길 타고 올라가고 수닭들은 그냥날라서 들어가곤했다.그리고 조용한 밤이면 소들의 되새김
질소리.위냥소리를 들어며 잠이 들곤했다.
정약용 이 모기때문에 빡쳐서쓴시
猛虎咆籬根(맹호포리근) : 맹호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
我能齁齁眠(아능후후면) : 나는코골며 잠잘수 있고
修蛇掛屋角(수사괘옥각) : 긴뱀이 처마끝에 걸려있어도
且臥看碗蜒(차와간완연) : 누위서 꿈틀대는꼴 볼수있지만
一蚊罌然聲到耳(일문앵연성도이) : 모기한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氣怯膽落腸內煎(기겁담락장내전) : 기가 질려 속이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
揷嘴沇血斯足矣(삽취연혈사족의) : 부리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吹毒次骨又胡然(취독차골우호연) :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는냐
布衾密包但露頂(포금밀포단로정) : 베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
須臾瘣癗萬顆如佛鷆(수유외뢰만과여불전) : 금방새 울퉁불퉁 혹이돋아 부처머리처럼 돼버리고
頰雖自批亦虛發(협수자비역허발) : 제빰을 제가쳐도 헛치기 일쑤이며
髀將急拊先已遷(비장급부선이천) : 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이미 가고없고
力戰無功不成寐(역전무공불성매) : 싸위봐야 소용없고 잠만공연히 못자기에
漫漫夏夜長如年(만만하야장여년) : 여름밤은 지루하기 일년과 맞먹는다네
汝質至眇族至賤(여질지묘족지천) : 몸통도 그리작고 종자도 천한것 네가
何爲逢人輒流涎(하위봉인첩류연) : 어찌해서 사람만보면 침을그리 흘리느냐.
나의어머니
어머니는 나이17에 시집을오셨다.
1918년생 이니까. 1829년쯤 되는해에 청도군 풍각면 에서 화악산을넘어 4살어린 신랑을 맞으려 누이말
로는 가마타고왔다고 한다. 어린신랑은 장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손은 공부를가르치면 고향를 떠날것을
염려하여 서당으로 보내셨다고한다. 삼촌은 대학까지 가르치며 집안에 잘된사람 한사람만있어도 집안의
후손들을 잘이끌거라 철저히 믿었던 분이시다.
아버지께서는 한학을 공부하며 한의학에 공부하여 한의사로 지내셨다.
30대에는 정치에 뜻을두어 자유당시절에 면의원을 지내셨기도했다.밀성중학교기성회장.월산국민학교
기성회장등을 역임하셨다.국민학교다닐적에는 교무실앞에 있는 아버지사진을보며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사회활동을하는 남편은 집안에 별관심이없어 어머니가 별난 시어머니.집안어른들의수발을 다듣는 그런
장손의 며느리의삶을 사셨다. 그런 어머니는결혼의봄날.삶의봄날은 그의없었다고생각된다,남편은 46세
어린나이에 돌아가시고 나서는 참으로많은 별별고생을 하셨다.할아버지께서는 무슨연유인지 모르오나
아버지돌아가시기전 6~7년전에 모든토지와 재산을 아버지가 아닌 종손인 큰형앞으로 상속을 하시는
관계로 재산권은 할아버지관리 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재산권은
어머니가 아닌 형님 형수에게 넘어가게 되어으니 사춘기말썽많은어린자녀4남1녀 학비.차비등을 며느리
에게타서 써야되는걸. 자존심이 얼마나 상해을까. 나이가비슷한조카들이3남이 있는관계로 우리형제들은
공중에떴다고해야하나? 그러나 그렇게 너무순종적으로 사셨다.이부분에서 안타까움에 눈물이 앞선다.
내겐 어머니란?군에있을때 휴가중에 김해에 고등학교를유학중인 동생의 둿바라지를위해 김해에 계셨다.
1주일치 쌀을집에서 가져가셨는데 그것마저 형수가 두명의한끼를계산해서 딱맞게 주니 아껴먹어 쌀을
조금팔아 학비로사용하고 쌀봉투를접어 풀로붙혀 쌀집에팔아 그작은돈을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어던 돈을 휴가온 아들에게 만원을주던 그기억들이 눈물이나는건 내어머니때문만은 아닐것이다.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니 1주일포상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귀대하여 얼마되지않았는데 또찿아오니 놀란어머니!
또그것뿐이아니였을꺼란생각에.돈을좀달란소리못하고 3일만에 귀대하였다. 내가제대후 돈을벌어 어머니
를 좀편히모시리란 생각을하며 제대후 경기의왕에 취직이되어 한2년간 어머니가 와 계셨는데 그때에 오래전부터 속알이병이 무슨병 인지 알아볼겸 세브란스 병원에 검사를받아보니 위암이라고 누님에게 전해듣고 얼마나 눈물이나던지....고생만 하셨는데...지금은 위암이수술이90% 완치률이 되지만 그때에는 수술초창기
시절 집안의뜻에따라 시골집으로..시골집에 안가면 안되는냐고 하시는말이 40여년이지난 지금도 비수처럼
남아있다.그렇게 사이가별로인 며느리의 간병을받게되었다.1여년 투병하며 1983년 음력정월19일 65세
나이로 영원한 안식을 취하셨다. 그소식을듣고 내려가서 얼마나울었던지.불쌍함에 꼭그렇게 사셔야 했을까?자식들.남편.시부모님.가족의평화를 챙기느라 막상 자기몸하나 제대로돌보지 못한어머니!.
올해도 기제사날 산소에올라 어머니에대한 잘해주지못한 미안함.죄송함. 어머니대한 그리는 아들의눈물이고 마음이었습니다.어머니! 당신은 오래참고 자랑하지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아니하며 성내지아니하며 자식.가족을위해 모든것을참으며 견드내신 어머니.당신의 한없는 헌신과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대한 조금의원망은 왜?재산상속이 아버지가 아닌 형님에게로 하셨는지에 아버지의
4남1녀는 없는자식으로 공중에뜬자식으로 큰형님이 재산형성에 기어없이 집안의재산이 형님
자식에게 상속되어 나뉘진것에대한 조금서운한것은 부인할수없는 사실이다. 1980년쯤 내게돈이 필요로해서 가장인 형님에게 500만원을빌린적이있었다. 그돈이 상속이라는것을.조카들에게 논(토지)들이 상속되었다는걸을 상속후 한참지난후에나 알았다.누구도 아르켜준일없이 그렇게 상속이되었다.
어릴적 우리엄마 시골스러움에 학교에 찿아올라시면 창피함에 멀리도망쳤다.그러나 세월이흘러 그자식인 내가60세가넘어 철들게되어 이런 어머니에게 감사드리게된다.그 어머니의 희생과 둿바라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자신이 존재할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것이다.그러나 이세상에서 같이없음을.. 저세상에서 편히
마음고생없는 저세상이 있기는한가요??? -어머니아들 후니가-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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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장손사랑
쌉짝문을열고 "할머니 저희들왔어요" 라고 하니 할머니는 신발을신지않고버선발로 뛰어나오시며 "우리장손!" "아이고.이것봐라! 뼈다귀밖에 없어가지고... 그리고는 조카인 장손이 불쌍해서 못견디겠다는 투로
"이런 고얀놈 새끼들!!" 시작이다. 나와 동생이 오자마자 듣는 저소리는듣는이유는 단하나였다. 장손인
조카의 손에 선물상자하나 오직 그것뿐이었다. 감히 장손에게 저상자를 들고있게 했다는것. 조카는 머쓱
했는지 "할머니~왜 화내세요 제가 삼촌들 아니였어면 못왔을꺼에요. 삼촌이 운전하고온다고 얼마나 고생
했는데요. 이것도 삼촌이 사온거예요!!" 그러자 "아유~ 우리장손 맘씨가 어쩜이리고울까? 그런데 저놈들은
쯧쯧......"나와 동생은 무슨 대역죄인이되어서 고개를 푹 숙일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내정신좀봐! 이늙은이가 우리귀한 장손을 밖에다가 세위두고 있었네! 얼른들어가자" 그러더니 조카의 손을잡고 모시다시피 안으로 데리고 가는것이다. 우리도 따라들어갈려니 "어딜 그냥들어와! 삼촌이란놈들이 조카에게 그런거나 들게하고" "둘다가서 집앞이나 좀쓸고와라" '왜 싫으냐? 그럼 그걸 이집 귀한 장손한테 시키랴? 조카는 미안했는지 '할머니 집앞은 저혼자쓸어도 되니까 삼촌들 좀쉬게하면 안될까요?' "에잉 당연히 해야하는걸 넌들어와 앉아있어라" 어쩔수없이 마당한켠에 있는 빗자루를들고 딱히 쓸만한것은 없으니 시늉이라도 하고 들어가면 끝이다. 조심스럽게 집안에 들어가니 "넌 거기 쓸게 얼마나있다고 지금까지 밍기적거리다가 들아와?
하여간 두놈다 지애미 닮아가지고..........죄송해요.....그렇게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노인은 우리를 거들떠 보지않고 오직 그저 장송.장손 노래를 부른다. 가시방석에 앉은것같았다.
"너한테 다 물려줄테니 어서 그냥말잘듣는 참한여자만나서 너닮은 아들하나만 딱 만들렴"
조카는 "얼른만나서 할머니 품에 꼭안겨 드릴께요" '아유 역시 우리장손이 최고야" 아~~참기힘들다
장손인큰형이 돌아가시자 더욱더 큰조카인 조카에게 모든기대를 거시는듯했다. 언젠가 중학교 시험떨어져
재수를 할려고 했을때 노인은 그것이 우리사남매 탓이라고 했다.
"네놈새끼들이 우리장손 좋은기운 다뺏어가서 이꼴난거야" 그러는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집 그자리에는
조카가 지키고있다. 할머니는 진짜 조카에게 전재산을 물려주고가셨다. 돌아오는 음력3월17일은 할머니
기제사날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출처:오유죠르노죠바니 에서 편집